오세은 - Oh Se-Eun (<Idol/Namsadang)

Radio show comments:
"Track 8 is a longer track with a worked out acoustic guitar intro. Other instruments for improvisation within the song are electric guitar and piano, and further on some female vocalist for a couple of high notes with a few other singers."
This third album sounds better or more attractive compared to the already reviewed fourth album. This is slightly melancholic, mostly acoustic folk/pop/rock with nice arrangements: songs led by male lead vocals with some dual vocal arrangements.
The fourth track has some nice additional string arrangements, and also the 6th is a bit more mellow spinning-head track and has some viola arrangement and a female wordless backing vocalist.
The 7th track has an additional electric fuzz guitar and piano arrangement and a small arrangement with the same backing vocalist.
On the 8th track acoustic guitars with melancholic organ lead a sad and mellow song.
A very enjoyable album.'

오세은 - 3집 우리 애인/고아 (재발매)
NC1004147
1.My Lover. 2. Our Lover 3. The Girl 4.Goodbye, If do,
5. LIfe 6. An Orphan, 7. You 8. When is separate 9. This distance
1. 우리 애인 ; 2. 두 그림자 ; 3. 그 소녀 ; 4. 안녕을 하면 ; 5. 인생을 ; 6. 고아 ; 7. 당신 ; 8. 헤이질 때 ; 9. 이 거리

"I expected more originality from this one, trusting Riverman’s choice of reissuing rare Korean albums.
There’s use of keyboards/organ, a pop/rock approach with attempts of more progressive use of guitars/organ (track 4), while most songs still are more mainstream. One track is soft blues-rock (track 5).
But there is however one outstanding original track that makes up a lot (track 8) for its high note baroque theme on keyboards, taken over by two acoustic guitars, a highly original song arrangement.
Last track shows also some rather rewarding arrangement on dual fuzz guitars (but still on a not too convincing song).
Nice sleeve, but a less rewarding album."
1. 노래하는 나그네 2. 여행 3. 님을 믿는 마음 4. 회색 바다 5. 지나온 시절
6. 친구에게 7. 아가씨야 8. 나의 노래 9. 당신과 함께 10. 금의환향

"This is a highly enjoyable folk songwriter album with a warm voice, with all comparable songs, accompanied mostly by two picking guitars and electric bass only and some accents here and there with a second harmony voice.
The first four track also have subtle string (and the first track also some subtle brass) orchestrations, with some violin solo on the second and flute solo arrangements on the third track.
The album is very pleasant and moody and invites for repeated listen.
On the third track I hear a small English sentence with “Donna I love you”, so I assume this might be a cover."
NC1004144
1. 그날이 오면 ; 2. 사랑하던 때 ; 3. 떠나기 전에 ; 4. 여름밤의 추억 ; 5. 떠나가야지 ; 6. 어제 걷던 길 ; 7. 친구야 ; 8. 가고 싶은 곳 ; 9. 인생을 ; 10. 이 거리 ; 11. 이 땅 위에 ; 12. 그대 나를 사랑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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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은
오세은은 1970년대에 활약한 포크 싱어 송라이터로, <또 만나요>, <고아> 등 숱한 히트곡을 남겼다. 특히 사회의식 강한 노랫말로 동세대 대학생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으며, 1970년대 이후에는 국악으로 관심사를 옮긴 상태이다. 오세은은 부잣집 막내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풍요로운 가운데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기타를 치고, 이후 1967년부터는 아이돌스(Idols), 훌라워스(Flowers) 등을 비롯한 그룹사운드의 보컬로 활약했다. 그리고 1970년대 초부터는 포크 열풍에 가세해, 이연실과 함께 통기타 가수로 전향한다. 1972년 발표한 데뷔 음반 「오세은 스테레오 선곡집」은 편안한 분위기의 포크송들이 담긴 음반이었고, 귀공자풍 오세은의 외모와 맞물려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더불어 이 음반은 많은 곡들이 사회성 강한 메시지로 인해 가사를 수정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73년작인 2집에서는 5인조 그룹사운드로 블루스의 색채가 짙은 록 음악을 시도했다. 이 음반에서는 70년대 밤업소의 영업 종료를 알리는 곡으로 자주 쓰인 <또 만나요>가 수록되어 있었다. 이 곡은 이후 딕 훼밀리(Dick Family)가 다시 불러 크게 히트하기도 했다. 3집 음반 「우리 애인/고아」는 샹송을 번안한 <고아>가 히트하며 오세은의 인기 행진을 이어갔다. 그러나 군사 정권은 <고아>가 사회 불신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지곡 철퇴를 휘둘렀고, 여기서 좌절한 오세은은 산 속으로 잠적해 버린다. 이 시기에 오세은의 국악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졌다 한다. 세 장의 음반을 내놓는 동안 음악적인 허탈을 느낀 오세은은 이 때문에 국악으로의 전향을 시도한 것라 할 수 있다. 그는 1975년부터 대금과 단소를 배웠고, 창과 판소리 등도 두루 섭렵하며 국악에 눈을 떴다. 그리고 한영애의 부탁으로 오랜 야인 생활을 끝내고 음악계에 복귀, 1978년 한영애의 앨범 「작은 동산」을 완성했다. 음반에는 오세은이란 본명 대신 친구 이름이 적혀 있는데, 이는 검열의 족쇄를 두려워한 때문이라고 한다. 오세은은 이후로도 한영애의 초창기 음악과 창법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1981년에 발표한 4집 음반 「님을 믿는 마음/노래하는 나그네」에서는 국악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음악에 투영했다. 정작 본인은 '가요에 가까웠다'고 술회하지만, 실제로는 음악적으로나 대중적으로 호평받은 뛰어난 음반이었다. 그럼에도 오세은은 국악 공부에 부족함을 느껴, 음반 작업을 중단하고 7년 여를 또다시 국악에 매달린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88년에 내놓은 「남사당」은 국악과 대중 음악의 조화가 이뤄진 눈부신 성과로 꼽힌다. 이 앨범은 국악의 각종 장단과 고시조, 한영애의 마력 넘치는 보컬 등이 어우러져 청자의 혼을 빼놓는 음반이기도 하다. 이후 오세은은 클래식 기타를 이용한 기타 산조에 많은 공력을 쏟고 있다. 포크 싱어에서 국악과 양악의 조화를 꾀하는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오세은의 음악 세계는 대중들에게 반드시 재평가되어야 할 음악인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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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gh translation:
Oh Se-eun is a folk singer songwriter who played an active role in the 1970s, and left many hits such as <See You Again> and <Or Goa>. In particular, he was strongly supported by the same generation of college students with his strong sense of social awareness.
Oh Se-eun was born as the youngest son of a rich family and was able to play music in abundance since childhood. He played guitar in the sixth grade, and since 1967, he has been a vocalist of group sounds, including Idols and Flowers. In addition to the folk boom in the early 1970s, he turned to a guitar singer together with Lee Yeon-sil.
His debut album, ``O Se-Eun Stereo Selection'' released in 1972, was a collection of comfortable folk songs. IThe lyrics expressed a strong social message.
In 1973's 2nd album, the five-member group sound was used to try the colorful rock music of blues. In this album, there was <Meet Again> which was frequently used to announce the closing of night businesses in the 70s. The song was later sung by Dick Family (?) and was a big hit.
The third album ``Our Lover / Goa'' continued the popularity parade of Oh Se-eun with ``Goa'' in Chanson style. However, the military regime wielded the ban on the album because of its message of social disbelief, and frustrated by it he retreats into the mountains. It was during this period that Oh Se-eun's exploration of Korean traditional music was made.
Oh Se-eun, who suffered a musical collapse after releasing its three albums, tried to turn to Korean traditional music. He has learned Daegeum and Danso since 1975, and he opened his eyes to Korean traditional music by listening to styles like pansori. At the request of Han Young-ae, he returned to the music world after completing his long life as a celebrity. In 1978, he completed Han Young-ae's album "Small Garden." The album has a friend's name instead of his real name, Oseh, because he is still afraid of the shackles of censorship. Oh Se-eun has greatly influenced Han Young-ae's early music and creation.
In 1981, his fourth album, ``Heart of Mind / Singing Neighbors'' showed his interest in Korean music in earnest. Close to the song music, it was actually an excellent record that was well received both musically and publicly. Nevertheless, Oh Se-eun feels that she is not good at studying Korean traditional music, so she stops his work and leaves Korean music for seven years. "Namsa-dang", released in 1988 his next effort, is regarded as a brilliant result of the harmony between Korean traditional music and popular music. This album is also a music album that captures the souls of listeners by combining various melodies of Korean traditional music, Koshijo and Han Young-ae's magical vocals.
Since then, Se-eun has been working hard on guitar sanjo using classical guitar. From folk singers to artists who harmonize both Korean and Western music, Oh Se-eun's world of music is one of the musicians that must be reevaluated by the 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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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 Se-eun died of cancer. 69 years old.
Oh Se-eun wrote and composed the lyrics of 'See you again,' which is called 'National Classic'. There are also representative songs such as ``Goa'' which was released in 1974 and banned at the time. He released his sixth album, The Blues, in 2007, where he became obsessed with blues. Since 1988, the music album ``Namsadang '' has been popular since 19 years.
He left his wife and a daugh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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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 also https://m.blog.naver.com/...
'가요전설' 오세은, 그는 왜 설악으로 떠났던가
[천호영의 문화초대석] <더 블루스>로 돌아온 '또 만나요'의 작곡가 오세은
07.11.19 23:55l최종 업데이트 07.11.22 18:05l
천호영(razl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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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블루스>의 오세은
ⓒ 오마이뉴스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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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은. 한 대중음악평론가는 그를 '숨겨진 한국대중음악의 전설'이라고 했다. 그러나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얼마 전까지 나는 그 '전설'을 몰랐다. 한 후배기자가 그가 새 음반을 냈다고 알려줬을 때 "오세은이 누군데?"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후배는 설명 대신 한 노래를 흥얼거렸다.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빠빠빠'로 시작하는 그 노래를 모를 수는 없었다. 70년대 말부터 거의 모든 유흥업소에서 문을 닫기 직전 '엔딩송'으로 울려 퍼졌던 노래. 세월의 흐름 따라 다방이 카페로, 고고장이 나이트클럽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거기에 노래방이 더해졌지만 마지막은 변함없이 '빠빠빠'가 장식했다. 70년대 그룹 딕 훼밀리의 히트곡 '또 만나요'. '국민엔딩송'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노래의 작곡ㆍ작사가가 바로 오세은이라고 했다. 후배는 그에 관한 몇 가지 정보를 더 들려줬다. 오세은은 60년대 미8군 무대 등에서 밴드 활동을 했고, 70년대 중반 대학가에서 인기를 끌었던 금지곡 '고아'를 불렀으며, 이후 설악산에 들어가 국악 공부를 시작하고, 한영애ㆍ남궁옥분 등 후배가수들에게 자신의 노래를 주었으며, 80년대 초 국악과 가요의 접목을 시도한 음반을 발표하고, 몇 년 전 가족과 함께 불교음악 음반까지 냈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환갑을 앞둔 나이에 직접 기타를 잡고 <더 블루스(The Blues)>란 독집 음반을 냈다는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70년대에 금지곡을 부르고 설악산으로 떠났다는 대목이 귀에 확 들어왔다. 대체 어떤 인물일까, 궁금했다. 인터뷰 약속을 잡고 인터넷을 검색했다. '40년 음악인생'이지만 그에 관한 기사는 4페이지를 채 넘지 못했다. 다만 적은 수의 기사들에서 자주 눈에 띄는 '은둔' '칩거' '신비' '기인'이란 단어들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듯했다. 블루스는 내 인생 광화문 한 카페에서 만난 오세은(59)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에 검은색 진 바지, 그리고 흰 운동화 차림이었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인다고 하자 "아이, 이젠 썩은 거죠. 나이 들면 슬픈 일 중에 하나죠. 할 수 없는 일이고,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고"라며 쑥스럽게 웃었다. "머리는 30, 40년 묶고 다녔으니까. 예전엔 군발이 때문에 깎고 많이 못 길렀는데, 전두환이 그것 두 가지는 잘한 거 같아. 통행금지 없앤 거 하고 머리 안 자른 거 하고, 하하하." 인터뷰 내내 그의 얘기를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의 인생이 그러했듯이 그의 얘기도 자유로웠다. 질문을 벗어나 그의 얘기는 현재에서 60-70년대로, 다시 현재로,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71년 솔로 첫 음반을 낼 때나 지금이나 음악 하는 자세나 마음은 똑 같다"는 그에게 우선 최근 발매한 <더 블루스> 음반에 관해 물었다. - 음반 타이틀이 <더 블루스>인데? "처음엔 '블루스와 기타'로 하려고 했는데, 어차피 내 이름이 타이틀이니까. 제 인생을 모두 그 단어(블루스)에다가 함축시킨 거죠. 음악적으로도 전체 리듬이나 색채를 블루스로 하고…. 솔직히 저는 랩 음악도 하고 싶고, 테크노도 하고 싶은데, 지금으로선 이것 하나만도 무사히 끝낸 걸 다행이라 여기죠." 그는 그동안 로큰롤, 포크, 재즈, 레게, 펑키, 하드록 등 음악의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계속 섞어가면서" 음악활동을 해왔다. 그러나 그 뿌리는 블루스였다. 이번 앨범에는 20대 때 처음 만들었던 블루스 노래 '나 혼자 외로워'부터 최근 만든 7곡까지 오롯이 블루스 스타일로만 11곡을 담았다.
▲ <더 블루스>의 오세은
ⓒ 오마이뉴스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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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블루스에 뿌리를 두되 '지금까지'에선 홍키통크 록을 들려주고, '강'은 래그타임(Ragtime)으로, '서울'은 로큰롤 리듬으로 푸는 등 다양한 색감의 '블루스'를 선사한다. 아리랑을 변주한 '아리랑 블루스', 그리고 전혀 다른 느낌으로 '또 만나요'의 블루스 원곡도 만날 수 있다. 이번 음반의 모든 곡은 '언플러그드(unplugged)'로 연주됐다. 기타는 그가 직접 잡았다. 특이하게 전자기타나 통기타 대신 클래식 기타를 사용했다. 그는 클래식 기타를 '나이롱 기타'라고 불렀는데, "블루스 음악에 나이롱 기타 연주는 아마 국내에선 처음 시도하는 것일 것"이라고 했다. 왜? 대답은 다소 싱거웠다. "나이롱 기타는 그룹을 하면서도 계속 쳐 왔어요. 저로선 나이 드니까 제일 편안하고, 나이가 들면 헤비메탈 록을 할 수 없걸랑요. 앰프 기타 들고 오래 못 있거든요. 꽤 무겁잖아요? 어깨 주저앉잖아요(웃음). 그래서 계속 나이롱 기타를 쳐왔고. 또 세상에 저밖에 못하는 사운드니까. 사람들이 괜찮구나 하고 들어주면 좋은 거고…." [노래듣기①] '아리랑 블루스' [노래듣기②] '또 만나요' 음반 작업에 함께한 세션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각 파트별로 내로라하는 김광석(어쿼스틱 기타), 김광민(피아노), 전성식(더블베이스) 등이 참여했다. 또 '신촌블루스'의 가수 이정선이 하모니카를 불었고, 김영준 서울신포니에타 음악감독이 바이올린을 켰다. 음반 재킷 사진은 사진작가 김중만의 작품이다. 그는 "선배라 무리한 부탁을 한번씩 하죠"라며, 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화려한 세션이 함께 뽑아낸 선율은 오히려 소박하다. 장인이 빚어낸 질그릇처럼 그의 음반에서도 예스러우면서도 서툰 고졸미(古拙美)가 느껴진다. 자신의 인생과 생활을 꾸밈없이, 삶을 관조하는 듯한 목소리로 노래한다. "기교도 많이 안 쓰고 가장 편안하게, 그래야 대중도 편안하게 들을 수 있을 거 같아요. 보통 녹음할 때 그림을 그리고 들어가잖아요. 그러나 이번엔 블루스란 코드만 가지고 노래도 만들면서 한 거거든요." "가사를 쓰려고 해도 못 쓰겠더라구요" 오세은은 1948년, 청계천 일대의 상권을 쥐고 있던 부잣집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스스로 "부르주아 집안"이라고 했다. 부족한 게 없었다. "제가 막내아들이고 어렸으니까 천방지축이라도 귀여우니까 다 들어주고 그렇게 자랐죠." 초등학교 시절부터 기타를 잡았다. 3년 터울의 형이 클래식 기타를 치는 걸 "곁에서 같이 뒹굴면서" 배웠다. 중ㆍ고등학교를 거치면서 "팝송을 마구잡이로 주어 듣고 따라 불렀다".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로큰롤 리듬이 10대의 그를 사로잡았다. 1966년 성균관대 법학과에 들어갔다. 그의 대학 시기는 한일협정 반대시위의 여파가 여전히 캠퍼스를 감싸고돌고, 베트남 파병이 이뤄지고, 부정선거(67년)가 자행되고, 통일혁명당사건(68년)이 조작되고, 삼선개헌(69년)이 강행 처리되는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제가 법대 들어가서 제일 먼저 배운 게 뭐겠어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딱 해놨는데…." 그러나 그는 학생운동과는 거리를 두었다. 현실을 잊고 그저 기타를 치고, 음악이 하고 싶었다. 1학년 가을, 초등학교 때 친구가 그를 찾아와 함께 밴드를 하자고 권유했다. "한 1주일 정도 연습했나? 당시 유행하던 곡 한 20곡을 가사 짧은 걸로 골라 막 연습하고 무대에 섰죠. 그리고는 학교는 강의시간만 나가고, 항상 이태원에서 살았죠. 이태원, 미8군 무대… 서울 시내 호텔에 친구들과 놀러 다니며 술 마시고. 보컬 하면서 여자 친구들 만나고, 미8군 들어가서 미군들이랑 친구하며 만날 놀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죠." 그는 당시 아이돌스, 훌라워스, 영바이블스, 라이더스, 메가톤스 등의 밴드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짧은 기간 많은 밴드를 전전했던 이유에 대해 "지금도 그렇지만 밴드는 만날 깨지고 뭉치는 게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히피문화에 빠져 들었다. "월남전이 터지고, 히피문화가 들어오고, 자유, 그런 사상에 꽤 심취를 했죠(웃음)."
▲ 오세은의 데뷔시절 기사. '포크로 전향해 데뷔했다'는 사진설명이 달려 있다.
ⓒ 최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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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로 넘어오며 대학가에는 통기타 열풍이 불었다. 그도 통기타를 치며 포크 대열에 합류했다. 홍대 미대 출신의 포크 여가수 이연실과 함께 조인트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1972년에는 대학 시절 작곡한 노래들을 모아 첫 독집음반 <오세은 스테레오 선곡집>을 냈다. 음반은 록 사운드가 아닌 포크 계열의 노래들로 채워졌다. - 록에서 포크로 '전향'한 셈이었나요? "그렇죠. 다양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줏대 없이 이리저리 한 거죠…." 그리고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덧붙였다. "사실 음악은 다 똑같은 거예요." 그러나 음악적 갈증을 느꼈다. 1973년, 2집 <오세은의 노래모음>을 내면서는 포크를 버리고 블루스 록을 시도했다. 사운드에선 갈증을 어느 정도 풀었지만, 노랫말에선 갈증이 더 심해졌다. 포크의 '자유'든, 록의 '저항'이든 가사에 담을 수 없었다. "단어 하나를 써놓으면 무조건 생각을 해야 되니까. 이게 걸리는 단어냐 아니냐. 그래야 발표를 할 수 있었으니까. 3집쯤 되니까 요령이 생겼는데… 그게 버릇이 되다 보니까, 창작에 한계가 있다 보니까 가사를 쓰려고 해도 못 쓰겠더라구요." '고아' 금지곡 판정... 설악산으로 1974년, 이번엔 포크와 록을 섞어 3집 <고아>를 발표했다. 가사도 요령껏 썼다. 다만 한 방송국 PD의 권유로 "별생각 없이 취입한" '고아'가 문제였다. '고아'는 프랑스 가수 끌로드 제롬의 샹송(L'orphelin)을 번안한 노래였다. "제가 만든 게 아니라 잊어버렸는데, 학생들 사이에서 꽤 많이 알려졌었나 봐요. 방송도 많이 타고, '월간 팝스' 같은 데선 1위도 차지했죠." 1974년은 '긴급조치 1호'와 함께 시작됐다. 시인 김지하는 "1974년 1월을 죽음이라고 부르자"고 외쳤다. 어둠의 시대, '고아'는 결국 금지곡 판정을 받았다. '지나친 비정' '불신감 조장'이 그 이유였다. 그뿐만 아니라 한대수ㆍ김의철ㆍ양병집 등 그해 음반을 발표한 가수들도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금지곡 가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불온' 가요는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건전' 가요가 채웠다. '고아'를 방송에서 더는 들을 수 없게 된 것은 물론 음반도 전량 회수, 폐기됐다. 그렇기에 '고아'가 실린 3집 음반(LP)은 현재 마니아 사이에서 희귀음반으로 상종가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갖고 있을까. "저도 없어요. 몇 년 전 와이프가 눈이 똥그래져, 신문에 2백몇십 만이라고 나왔다고 (집안을) 뒤지고 난리를 치더니 껍질 하나 찾아내더라고요." 뻔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슬쩍 물어보았다. 혹시 그 같은 조처에 저항할 생각은 안 했는지? "전혀. 저는 뭐… 주로 자유, 피스(peace) 찾는 주의니까. 너는 그래라. 나는 딴 데 가서 놀 게. 알았어, 그러고…." 서울을 떠나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강원도 고성의 흘리란 곳이었다. 당시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산간벽지였다. 저항도 못했지만 타협도 하지 않았다. 그는 도피를 택했다. "그 당시엔 워낙 사회적으로, 뭐, 연예인들 대마초 사건도 있고…. 집에서도 20대 후반이 되니까, 만날 사고만 치고 돈만 달랑 가져가니까, 결혼하라고 (해서) 도피한 거죠." 한영애 솔로 데뷔의 배후 그는 설악에서 국악에 빠져 들었다. 서울을 오가며 김중섭 선생에게 대금과 단소를, 박동진 선생에게 창과 판소리를, 이양교 선생에게 시조를 배웠다. "단소 매일 불고, 국악 공부하고, 기타는 항상 들고 다니니까 치고, 매일 살쾡이처럼 산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일이었죠. 저녁 때 시간 나면 명상하고. 특별히 머리 깎고 그런 생각은 안 했었는데 기공, 단학, 선… 별짓을 다해봤죠. 점쟁이는 점집 내라고 그러기도 하고." - 국악에 관심을 갖게 된 까닭은? "'고아' 내고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그럴 때인데, 제 개성을 좀 찾고 싶었죠. 또 스케일은 커가지고, 제 노래가 비틀즈나 에릭 클랩튼처럼 전 세계에서…(웃음). 세계적인 것 하려면 우리 것이 먼저 몸에 배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부터 5집 까지." class="photo_boder" style="border: 1px solid rgb(153, 153, 153); display: block; text-align: center; max-width: 600px; width: 502.015625px;">
▲ 오세은의 독집음반. 1집 <오세은 스테레오 선곡집>부터 5집 <남사당>까지.
ⓒ 최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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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틈틈이 노래를 만들었다. '해바라기' 출신 한영애의 <작은 동산>(1978년) 음반을 기획, 제작하기도 했다. '설악산'(이후 남궁옥분이 리바이벌함) 등 자신이 만든 곡을 직접 연주했다. 그러나 음반에는 그의 이름이 어디에도 없다. '금지곡 가수'라 괜히 꼬투리를 잡힐까봐 자신의 곡을 친구이름으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는 '숨은 고수'로 알려졌고, 동료 사이에서도 '기인' 취급을 받았다. "내가 잘 안 나타나니까 그런 거죠. 어울리지 않으니까…. 혼자서 잘난 척하다가 여태껏 아무것도 못 하고 그러고 살았던 거죠." 그의 이름이 다시 음반 표지에 인쇄되는 데는 7년이 걸렸다. 그 사이 '유신'이 막을 내렸고, 그는 결혼해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1981년에 발표한 4집 <노래하는 나그네>에서 그동안 공부한 국악과 가요의 결합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대중적 음악활동을 접고 다시 7년을 국악에 정진했다. - 대중적인 음악 활동을 안 한 이유는? "불만이 많은 거죠. 제 자신에 대한 불만도 있고, 사회에 대한 불만도 있고. 음반을 만들어도 내 마음에 안 드니까. 미술은 작품이 나와도 찢어버리면 되는데, 음반은 나와 버리면 그게 안 되잖아요. 한창 반성 많이 하고 새롭게 다시 한번 하자 해서 또 하고. 마음에 안 들고 대중이 호응을 안 해주면 또 접고…(웃음)." 블루그래스 주법의 독보적인 존재 1988년, 7년 만에 한국적 가락이 한층 농익은 5집 <남사당>을 선보였다. 기타-베이스-드럼-키보드-색소폰 등 서양악기로 '각설이타령'과 '한오백년' '진도아리랑' 등을 연주했다. 한영애가 보컬로 참여했다.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은 <남사당>에 대해 "현란한 환상음악 특급 그 자체"라며 "(당시) 대중가요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은" '불후의 명반'으로 평가했다. 사실 그는 작곡가로서보다는 기타 연주자로서 더욱 뛰어났다. 김수철에 앞서 '기타 산조'를 실험했으며, 특히 블루그래스 기타 주법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1983년 블루그래스 주법에 관한 교본을 출판하기도 했다.
▲ <더 블루스>의 오세은
ⓒ 오마이뉴스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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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요즘도 매일 2, 3시간씩 기타를 잡는다. 그렇게 안 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연주하는 손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무거운 건' 들지조차 않는다. 현재 사용하는 클래식 기타는 수천만원을 넘는 '명품'이다. 그래서 아내에게 미안하다. 2005년, 아내와 딸과 함께 <보현십원가>란 음반을 냈다. 공교롭게 이번에도 7년 만이었다. 고려초 고승 균여 스님의 향가에서 노랫말을 가져왔다. 힙합그룹 드렁큰 타이거의 타이거 JK도 참여해 '여래를 찬미하네'란 곡에 랩을 곁들였다. "가사를 못 썼잖아요. 남이 쓴 글을 자꾸만 보다 보니까 '보현십원가'란 향가가 기억에 남더라구요. 당시엔 고 양주동 박사가 쓴 거 밖에 없더라구요. 한학자에게 번역해달라고 그러며 한문하고 원문하고 찾아서 정리해봤어요. 시간 날 때마다 들여다보니까 어느 날 가사가, 부처님 말씀이 구구절절이 가슴에 와 닿는 거예요." 그는 오세은 대신 '오무산'이란 이름으로 음반을 발표했다. "제 생애에서 제 역할이 사람들한테 좋은 뜻을 알리고 퍼뜨리고, 그걸 중계하는 역할이라더라구요. 이번 생애에 음악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보시하고, (기독교에서) 십일조 하듯이 제가 음성 공양 한번 해봐야겠다 싶어서… 이 정도면 부처님이 음성 공양했다고 하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한 거죠." "마지막까지 자유롭고 싶다" 현재 그는 청평에서 살고 있다. 그곳에 자리 잡은 지 5년가량 됐다. 지난해엔 동덕여대 방송연예과에서 뮤지컬 음악을 강의했다. 약 150명의 학생들이 수강했다. 그 가운데 아이비도 있었다. 제자에 대한 애틋함이었을까, 아니면 대중과 멀리 떨어져 지내야 했던 자신의 아픔이 새삼 떠올라서였을까. 그는 아이비의 활동 중단에 대해 무척 안타까워했다. "아이비 요새 보면 딱해 죽겠어. 수업도 열심히 잘 들어오고 그랬었는데. 가수가 뜨는 시기가 있거든요. 연예인이란 게 다 시기가 있는 건데, 한 단계 올라가려고 그러다가 한 단계 떨어져가지고…. 게다가 그 이미지를 평생 짊어져야 하니까…."
▲ "자유롭게 살고 싶다" <더 블루스>의 오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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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더 블루스> 음반에는 '아직은'이란 곡이 실려 있다. '아직은 끝이 아니야 / 살다보면 언젠가는 끝나겠지만 / … 아직은 길을 가야 해 / 가는 길이 힘이 들고 멀다고 해도 / 내가 가야 하는 길이 이 길이라면.'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은 어디로 향할까. "그건 뭐 자아를 찾는 길이죠. 저는 그것밖에 없어요. 남들이 보면 '또라이' 같고 이상하고 그렇죠. 이러고 (자신이 신은 흰색 운동화를 보여주며) 큰 그룹 회장실에 친구라고 그러고 가 봐요. 저 아저씨 뭐야 하고 뛰어 나와요(웃음)." - 음악적으로는? "이제는 정리하는 일 밖에 없죠. 지금까지 해왔던 음악들을. 음반도 체력이 받쳐주면 더 내겠지만 이번 거 끝낸 거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고. 내년까지는 라이브도 해보고… 젊은 애들한테 평생 블루스 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보여줘야죠." 그러면서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마지막까지 자유롭게 사는 게 꿈"이라고 덧붙였다. "워낙 음악뿐만 아니라 사회생활 모든 것 자체가 억눌림 속에서 살았으니까. 봉건사회 속에서, 독재 속에서 억눌리면서 살았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지금은 블루스 스타일로 내 것만 하려고 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요. 어울리지 않아도 되고."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은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땅에서 진정한 음악의 탐구는 천형일까? 당대에 유행하는 주류 음악이 아닌, 삐딱한 음악을 추구하는 뮤지션은 어김없이 무관심과 생활고라는 가혹한 2중고를 각오해야 한다. 음악 업적보다 인기 여부가 모든 음악의 평가 잣대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그러진 후진적 가요계의 음악 환경은 뛰어난 뮤지션들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고독한 은둔의 습지를 내몰아왔다. 오세은은 그런 뮤지션들 중에서도 으뜸이다." <더 블루스>란 음반으로 조심스럽게 세상과 '또 만나기'를 소망하는 오세은. 자유를 갈구하는 그의 영혼이 다시 '고독한 은둔의 습지'로 내몰리지 않기를! 더불어 그가 진정 자유롭고자 한다면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도 헤아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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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ed fragments:
'The Legend of Music' Oh Se-eun, why did he leave for Seorak?
Composer Oh Se-eun of 'See You Again' returned to The Blues. 07.11.22 1
Singer Oh Se-eun released the blues album 'The Blues' within two years and six months after 'Bo Hyun Ship Hyunga'
A popular music critic called him 'the legend of hidden Korean pop music'. Unfortunately I did not know the 'legend'. When a junior reporter informed him that he had released a new album, he had to ask, "Who is O Se?" He had to hum a song instead of giving explanation.
"Now we'll meet again next time." Since the late '70s, almost all entertainment venues sang its song. As time went by, cafes were replaced with old-fashioned nightclubs, and then replaced once more by karaoke bars.
Oh Se-Eun was the composer of 70's group Dick Family's hit song 'See you again'. A song which can be called the "national ending song".
Oh Se-eun played a band on the stage of the Eighth Army in the 1960s, where he sang the banned song ``Goa'', which was popular in college in the mid-70s. Afterwards, he entered Seoraksan and began studying Korean traditional music. He released a record that attempted to combine Korean music with song music in the early 80's, and released a Buddhist music record with his family several years ago. And now, at the age of sixty, he grabbed his guitar and sang The Blues.
Above all else, when he  heard that there were banned songs in the 70's he left for Soraksan. For his '40 years of music life I could not find much more than a few pages. However, the words 'hiding' and 'mystery' and 'factor' were are often noticeable in a small number of articles.
Oh Se-eun (59), who I met at a cafe in Gwanghwamun, wore long-length legs, black jean pants, and white sneakers. When he looked younger than his age, he said, "Child, it's rotten now. It's one of the sad things when you're older. "Because I've been tied for 30 or 40 years. Recently I had to cut my hair, haha."
It was not easy to catch up with his story throughout the interview. Just as his life was, his talk was free. Escaping from the question, his story flowed freely from present to the sixties and seventies. "When I released my first solo album in 71 and now, the attitude and mind of the music are the same," he first asked about his recent release of The Blues.
-The album title is <The Blues>? "At first I was going to be" Blues and Guitar, "but the title is who I am right now. I implied my whole life with that word (Blues). Musically, the whole rhythm or color is blues. I'm glad I've finished this one safely. "
He has been doing music by "mixing" the music genres, including rock and roll, folk, jazz, reggae, funky and hard rock. But the root was the blues. This album contains 11 songs only in blues style, from the blues song 'Lonely Alone' that I made when I was in my twenties, to seven recently made songs.
All of the tracks were played "unplugged." The guitar played by himself. Uniquely, he used classic guitars instead of electric and acoustic guitars. He called the classical guitar 'Nylon Guitar' and said, "Nylon guitar playing in blues music is probably the first attempt in Korea." Why? The answer was rather fresh.
"I've been playing the guitar long as a group. I'm the most comfortable with my age, and I can't play heavy metal rock when I'm older. So I've been playing my guitar all the time. And it's the only sound in the world.
Accompaniments were done by Kim Kwang-suk (acoustic guitar), Kim Kwang-min (piano), and Jeon Seong-sik (double bass), each of whom were considered as members. In addition, singer Lee Jung-sun of 'Shinchon Blues' sang harmonica, and music director Kim Young-joon of Seoul Shin-Ponieta played the violin. The album jacket photo is made by photographer Kim Joong-man. I am very grateful to that.
The melodies of the gorgeous sessions are rather simple. Like the earthenware that his father-in-law has created, his album records are both pretty and clumsy. Singing in a voice that contemplates life without adorning one's life.
"I don't use a lot of finesse and I feel comfortable so that I can listen to the public comfortably. I usually draw pictures when I am recording. But this time I just made a song with a chord of blues."
Oh Se-eun was born in 1948 as the youngest son of a rich family who held the upper right of Cheonggyecheon. He called himself coming from "the bourgeois family." There was nothing lacking. "I was the youngest son and I was young, so it was cute."
I have been playing guitar since elementary school. For three years, he learned how his brother played a classical guitar "by rolling along". Through middle and high school,The Beatles, Elvis Presley and the Rock and Roll rhythm were captured by him as a teenager.
In 1966 he entered the Department of Law, Sungkyunkwan University. In his university period, the aftermath of the protests against the ROK-Japan agreement still surrounds the campus, Vietnam is dispatched, illegal elections (67 years), unification revolutionary events (68 years) are manipulated, and the Three Constitutional Reform (69 years) It was a cluttered period of time.
"What was the first thing I learned when I went to law school." Korea is a democratic republic. "
But he distanced himself from the student movement. I forgot its reality and just played the guitar and wanted to make music. In the fall of first grade, a friend in elementary school invited him to join the band.
"Did you practice for about a week? I picked up 20 popular songs with short lyrics and practiced on the stage. Then I went to lectures and lived in Itaewon all the time. Itaewon, Eighth Army stage¦ Seoul downtown I went to the hotel to hang out with my friends, drink, vocals, meet my girlfriends, go into the Eighth Army, play with my friends and play with them¦.
He played guitar and sang in bands such as Idols, Hollows, Young Bibles, Riders, and Megatons. At the same time, he naturally fell in love with hippie culture.
"The vietnamese war broke out, hippies came in, freedom, I was quite impressed with that idea (laughs)."
In the '70s, there was lots of guitars in college. He also joined the folk scene with a guitar. He also held a joint concert with Lee Yeon-sil, a folk singer from Hongdae University. In 1972, he wrote his first solo album, `` Ose Eun Stereo Selection, '' which was composed of songs composed in college. The album was filled with folk songs, not rock sounds.
Did you "turn" from rock to folk? "Yes. You can say it's diverse, in a word, it's all about it."
"The music is actually the same thing."
But I felt a musical thirst. In 1973, he threw his fork and attempted blues rock while publishing his 2nd album, "Ose Eun Song Collection." The sound quenched my thirst to some extent, but the song ended up worsening. The lyrics couldn't be included in the folk's 'freedom' or 'rock' resistance.
"If you write one word, you have to think unconditionally. Is it a word that takes it? So I was able to make a presentation.
In 1974, he released his third album, Orphan, with a mix of folk and rock. I wrote the lyrics as well. The only problem was the "orphans," which was written spontaneously 'Goa' was a song for L'orphelin, a French singer, Claude Jerome.
"I didn't make it, but I forgot it, but I think it's known a lot among the stud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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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전부터 가요마니아들 사이에는 오세은의 '고아'가 수록된 음반을 찾는 숨바꼭질이 한창이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창작곡도 아닌 끌로드 제롬의 샹송을 번안한 '고아' 음반을 왜 "자켓이라도 한번 봤으면 좋겠다"며 찾아 헤매는 것일까? 그의 음반은 신중현 사단의 김정미와 함께 고가 희귀판의 대명사로 슬그머니 이름을 올리더니 강한 전염병처럼 애호가들을 감염시키고 말았다.
건축업 등으로 청계천 일대의 상권을 쥐고 있던 부자집 막내아들(4남2녀)로 태어난 오세은. 초등학교 6학년때 기타에 빠져 대학생이 되었던 60년대말에는 이미 기사가 딸린 자가용을 타면서 풍요로운 음악생활을 했을 정도다.
그룹의 모든 악기를 소유한 재력은 물론이고 탁월한 기타실력은 주변으로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다. 음악에 빠져든 것은 클래식기타 교본을 저술하고 후에 서유석의 기타스승이 된 셋째형의 영향이 컸다. 포크가수로 알려진 그는 사실 한국 록그룹의 2세대쯤 된다.
1967년 대학시절부터 아이돌스, 훌라워스, 영바이블스, 라이더스, 메가톤스로 이어지는 그룹들의 리드기타 겸 보컬리스트로 미8군 무대에 섰다. 아이돌스 때는 베이스를 담당한 서울대음대 출신의 차남학이 오세은을 보컬로 픽업했다.
이때는 창작곡보다는 외국 팝송이 주 레퍼토리. 당시 대개의 록그룹들처럼 음반 출시보다는 밤무대 라이브에 치중했고, 메가톤스 시절인 1971년 에 낸 캐롤판을 포함해 2장의 음반이 그룹시절 음반의 전부이다.
60년대말~70년대초반의 대학가는 통기타 열풍지대. 오세은도 TBC모닝쇼 방송 출연과 명동의 OB's캐빈 등 일반 업소에서 이연실과 함께 통기타를 치며 포크 리듬에 휘말린다.
1972년 12월10일 대학시절 때 작곡한 곡을 모은 데뷔음반 <오세은 스테레오 선곡집- 지구,JLS120631>을 발표했다.
수록된 12곡은 모두 애잔하면서 우수에 젖은 편안한 멜로디의 포크곡들. 대표곡인 '친구야'는 낮고 느릿느릿한 곡조로 처음보다는 들으면 들을수록 감칠 맛을 낸다. 대학가에선 제법 인기있는 레퍼토리가 됐다.
여학생 잡지의 모델에 나설 정도로 잘생긴 오세은이 김포들판을 배경으로 찍은 근사한 자켓 사진도 사진이지만 여러 곡의 백보칼을 자신이 직접 불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듀엣같이 들리지만 사실은 오세은의 두 목소리를 더빙한 것. 기타연주도 마찬가지다.
1집은 사실 완벽한 음반은 아니었다. 사전검열에서 사회성 강한 대부분 곡들이 퇴짜를 맞아 상당부분의 가사를 개작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는 "당시는 곡을 쓰기가 겁이 났을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첫 앨범은 록사운드로 연주하고 싶었지만 MBC FM측에서 한양대 장일남 교수에게 대중적 분위기의 멜로디로 1면 편곡을 맡겨 버렸다고 한다.
김민기 등 초기 대부분 포크 가수들의 앨범제작에 참여했던 PD 김진성은 '친구야'를 타이틀곡으로 밀었지만 제작자들은 상업적으로 포장한 '그날이 오면'을 택했다. 2면을 들어야만 오세은류의 덜 익어 풋풋한 포크향기에 그나마 취할 수 있다.
2집(1973년 출시)에선 데뷔 앨범때 느낀 음악적 갈증을 달래려 어설픈 포크를 버리고 친구들과 5인조 록그룹을 만들어 블루스 계열의 록음악을 시도했다. 주목할 것은 70년대말~80년대 거의 모든 다방이나 카페, 고고장에서 업소의 영업마침곡으로 사용했던 딕 페밀리(서생원가족)의 <또만나요>의 오세은 오리지널 버전.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헤어지는 마음이야 아쉬웁지만 다음에 다시 만나요' 빠르고 경쾌하게 재편곡해 히트한 1977년의 딕페밀리 버전이 다분히 상업적이라면 오리지널은 느릿느릿하면서도 끈적이는 블루스 버전. 언뜻 다른 곡으로 착각할 정도다.
<또만나요>는 오세은 작곡 노래중 가장 대중적으로 파고든 히트곡이다. 2집에는 정미조가 부른 '그사람'의 오리지널 버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문제의 음반 3집<고아-지구,JLS120845, 1974년4월8일>. 지구레코드녹음실의 대형 프랑스 여가수 사진을 배경삼아 찍은 공식 발매 자켓과 실루엣으로 처리된 변형 자켓 등 두가지 버전이 있다. '고아'는 PD 김진성이 프랑스 원판을 들려주며 권유, 번안하여 취입한 히트곡이지만 정작 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고아'는 사실 음악적으로 대단한 곡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수어린 멜로디에 담긴 염세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오세은의 여린 목소리는 가슴을 저리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다. 숨겨진 명곡은 2면의 두번째곡 <당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8분30초라는 롱버전의 블루스곡이다.
3집의 희귀성은 '고아'의 가사가 사회불신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지딱지가 붙여졌기 때문이다. 좌절감을 맛본 오세은은 새로운 음악을 찾기 위해 국악에 빠져 설악산의 심산유곡으로 홀연히 잠적해 버린다.
한번도 아내의 장바구니를 들어준 기억이 없는 오세은. 행여 무거운 짐을 들다 손을 다쳐 연주를 못하게 될까 두려워서였다. 그는 음악을 늘 인생의 최우선 순위에 둔 외골수 스타일이다.
3집까지 록과 포크를 모두 섭렵했지만 음악적 성취감 보다는 마음 한편에 마치 큰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그래서 3년간의 설악산 생활은 심신을 맑게 하는 명상의 시간이자 새로운 음악을 탐구한 모색기간이었다.
1975년부터 국립국악원의 김중섭 선생으로부터 대금과 단소를 배우면서 우리가락에 눈을 떴고 이후 박동진 선생에게 창과 판소리, 단가를 이양교 선생에겐 시조를 배우면서 국악의 깊은 맛에 점점 더 빠져들게 됐다.
1978년 4인조 혼성포크그룹<해바라기>의 한영애가 솔로데뷔를 꿈꾸며 곡을 부탁하는 바람에 오세은은 은둔에서 벗어나 세상속으로 되돌아왔다. 2,3집 시기에 만들어 놓은 '작은 농산'과 설악산 생활 때 만든 '설악산' 등 9곡으로 한영애의 솔로데뷔음반 <한영애 작은동산-유니버샬 SIS78105, 1978년12월>을 제작했다.
이 앨범에서 오세은이란 이름 석자는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다. 금지된 3집이후 검열의 무게 때문에 모든 곡을 김동운, 우성삼 등 친구 이름으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한영애가 공식1집으로 주장하는 <여울목-서라벌. 1986년>에서는 그가 2곡을 작곡하고 기획, 편곡, 코러스, 연주까지 참여했다. 한영애의 끈적이는 느릿한 창법이 오세은의 그것과 흡사한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4집<노래하는 나그네-한국음반 HC200122, 1981년12월24일>은 6년간의 음악 공백을 깨뜨린, 당시로서는 일반에게 생소한 국악가요앨범이다. 타이틀은 원래 '거리의 악사'였지만 왠지 모르는 가위눌림이 '노래하는 나그네'로 순화시켰다고 한다.
외국의 아트록 앨범 자켓을 능가하는 멋진 추상화 자켓은 홍익대 미대를 나와 경주대 미대학장을 역임한 김명호 교수의 작품. 자켓만으로도 4집은 마니아들의 시선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하다.
대표 곡은 '노래하는 나그네'이지만 다운타운가에선 '여행'이 DJ연합회 인기차트 3위까지 오르고, 라디오방송의 주요 레퍼토리였을만큼 히트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4집은 국악을 배우면서 산조를 마스터하지 못해 완벽한 수준이 아니었다. 열심히 했지만 깊이 있는 연주보다는 대중가요적인 노래 위주의 창법에 머물러 아쉬웠다"고 겸손해 한다.
4집의 10곡은 국악의 5음계 가락을 오세은의 기타, 손학래의 라이어콘, 박훈의 베이스, 김명곤의 오르간, 알토 섹소폰, 배수연의 드럼, 타악기 등 서양악기에 접목을 시도한데 의미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2면 끝에 건전가요로 아예 <애국가>를 넣어버린 오세은식의 세상 비꼬기다.
4집을 내면서 그는 서양악기로 국악을 완벽하게 표현하기엔 실력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래서 어설픈 음반 발표보다는 7년동안 국악배우기에 혼신의 힘을 쏟는다.
또한 1983년에는 블루스록 연주에 필수적인 블루그라스 기타주법에 관한 교본을 집필하여 보급에 앞장섰다. 블루그라스는 에릭 클랩튼 등 서양의 대부분 일류 기타리스트들이 구사하는 주법으로 국내에서는 오세은이 독보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적 가락이 한층 농익은 5집<남사당-서라벌SKJY90008, 1988년8월8일>은 10여년을 국악에 몰두한 오세은 음악의 결정판이다. 서양 악기로 표현한 우리 국악의 5음계는 가슴 떨리는 감동을 줄 정도.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세은이 읊어대는 시조가락. 한영애, 이보임의 보컬과 어우러진 강강술래가 진양조, 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땐 현란한 환상음악 특급 그 자체이다.
진도아리랑, 한오백년의 오세은식 해석도 새롭다. 이 불후의 명반에서 압권은 아리랑블루스와 타령3,2,1. 가장 어려운 영산회상곡인 타령1, 경복궁타령 같은 일반적 타령을 타령2로, 가장 쉬운 각설이 타령인 타령3을 감상자들을 위해 쉬운 곡 우선으로 역순배열을 했다.
5집<남사당>에 왜 마니아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정답. 이처럼 깊이있는 대중가요는 유래가 없다.
그의 음악은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만 한다. 미발표 상태지만 판소리 완창에 버금가는 기타산조 연주음반의 완성으로 음악적 갈증은 어느 정도 해갈하였다. 그는 기타산조를 위해 앰프기타를 버리고 클래식 기타에만 전념했다.
최근 일본의 음악 제작자들이 자주 찾아오긴 하지만 상업적 농간에 환멸을 느껴 음악적 의욕이 많이 사라진 상태다.
요즘은 컴퓨터로 듣는 전세계의 새로운 음악듣기에 푹 빠져있다. 새롭게 시도하고 싶은 음악이 있다면 국악에 기초해 재즈와 접목한 테크노와 정통 블루스. 전설적인 인물이지만 베일에 가려있는 오세은. 그가 진정한 평가를 받아 다시 음악에 정진할 수 있도록 우리 가요계의 변화를 기대해 보는 것은 아득한 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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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ial translation:
His album, along with Shin Jung-hyun's Kim Jung-mi, was synonymous with high-priced rare editions and highly looked after.
Oh Se-eun was born as the youngest son (4 sons and 2 daughters) of a wealthy family who held the business districts of Cheonggyecheon around the construction industry. By the end of the sixties, when he was a college student in the sixth grade of elementary school, he had a rich musical life while riding a car with driver.
The excellent guitar skills as well as the possession of all the instruments of the group brought envy for his surroundings. His indulgence in music was largely influenced by his third brother, who wrote classical guitar textbooks and later became Yoo Seok's guitar teacher. Known as a folk singer, he is actually also part of the second generation of a Korean rock groups.
Since 1967, he has been on the stage of the Eighth Army as a lead guitarist and vocalist for the groups that lead to Idols, Hollows, Young Bibles, Riders and Megatons. For the Idols, Cha Nam-hak, a former Seoul National University who was in charge of bass, picked up Oh Se-eun to sing vocals.
At this time, foreign pop songs were his repertoire rather than original songs. Like most rock groups at the time, the band focused on live performances rather than recordings, and two of them are all in the group's time, including Carol's version in 1971, during the Megatons.
In the university streets of the late '60s and early' 70s there are things going on. Oh Se-eun also plays on the folk rhythm with Lee Yeon-sil in general businesses such as TBC Morning Show broadcasting and OB's Cabin in Myeong-dong.
On December 10, 1972, he released his debut album, ` O Se-Eun Stereo Selection-Earth, JLS120631 '', which was composed during his college days. All 12 songs are folk songs of comfortable melody that are simple. The representative song 'Friend' is a low and slow tune, and the more you listen to it than the first, the more you like it. In college, it has become part of the popular repertoire.
Oh Se-eun, who is handsome enough to appear as a model for a female student magazine, at the same time is seen as interesting because he sings several songs of his own. It sounds like he is sometimes singing in duet, but it is actually dubbed over with two of Oh's voices. The same is true for other performances.
The first album was not a perfect record. In the pre-censorship, most of the societal songs were censored and he had to suffer because of a lot of rewriting.
"I was so scared to write a song," he recalls. I wanted to play the first album with rock sound, but MBC FM said that I left the one-sided arrangement as a popular melody to Professor Jang Il-nam of Hanyang University.
PD Kim Jin-sung, who participated in the album production of most folk singers including Kim Min-gi, pushed 'friends' as the title song, but the producers chose commercially packaged 'When that day comes'. You only need to lift the two sides to get drunk with the less ripe, fresh pork folk.
In his 2nd album (released in 1973), he threw away his frustrated folks to soothe his thirst for his debut album and made a five-member rock group with his friends to try the blues. It is worth noting that the original version of Ose Eun's original version of Dick Family (Teo Saengwon Family), which was used in almost all cafes, cafes, and shops in the late 70's and 80's, was used for business.
'Now we'll meet again next time we'll break up ... It's a shameful heart, I'll see you again next time'.
If the 1977 DickFamily version of the fast and lightly reorganized hit is a lot commercial, the original is slow and sticky. A blues version. At first glance, it is mistaken for another song.
See You Again is the most popular hit song by O Se. The 2nd album also contains the original version of 'The Man' sung by Jung Mi-jo.
Collection of Problems Vol. 3 (Goa-Earth, JLS 120845, 8 April 1974). There are two versions: an officially released jacket with a large French female singer in the Earth Records Recording Room and a modified jacket with silhouette. 'Goa' is a hit song that PD Kim Jin-sung gave a French version.
'Orphan' is not really a great musical piece. Nevertheless, Oh Se-eun's fragile voice, which conveys the pessimistic message in the excellent melody, has a magical heart. The hidden masterpiece is your second song <You>. It's a long version of Blues that's hard to find.
The rarity of the third album is because the lyrics of 'Orphan' were banned because they promoted social distrust. Frustrated, Oh Se-eun turns to Korean traditional music to find new music and falls silently into Seoksan's deep mountains.
On the 3rd record, he used both rock and folk, but he felt empty as if a big hole had been drilled in his heart rather than receiving a sense of musical achievement. So three years of Seoraksan life was a time of meditation to clear mind and body and exploration of new music.
Since 1975, he learned the Daegeum and Danso from Kim Joong-seop of the National Gugak Center and opened his eyes to folk rhythms. Afterwards, he became immersed in the deep taste of Korean traditional music by learning Dong-jin Park, Pansori, and Danga.
In 1978, Han Young-ae of the four-member mixed folk group <Sunflower> dreamed of making a solo debut and asked for the song. He produced Han Young Ae's solo debut album, Han Young Ae Small Garden-Universal SIS78105, December 1978.
In this album, you can't find the name Oh Se-eun. Because of the weight of censorship after the banned 3rd album, all songs were released under the names of friends such as Kim Dong-un and Woo Sung-sam.
<Seoul Mok-Sehrabol, Han Young Ae claims to be the 1st official album. In 1986, he wrote two songs and participated in planning, arrangement, chorus, and performance. This is why Han Yeong-ae's slow and slow method is similar to that of Oh Se-eun.
4th Album-Singing Neighbor-Korean Album HC200122, December 24, 1981, is a song album unfamiliar to the public at that time that broke the six years of music. The title was originally ` Street musicians'' but it is said that the crushing censorship have been renaming it to ``singing strangers''
The cool abstraction jacket that surpasses the foreign art rock album jacket is the work of Professor Kim Myung-ho who served as the Dean of the U.S. University of Gyeongju Univ. The sleeve of nr.4 alone is enough to attract the attention of enthusiasts.
His representative song is `` Singing Wayfarer, '' but in downtown downtown, `` Travel '' hit the 3rd place in the popularity chart of DJ federation, and it was a hit as it was the main repertoire of radio broadcasting.
"4th house was not perfect he said because I couldn't master Sanjo while learning Korean traditional music. I tried hard, but I was sorry to stay in the popular song-oriented creation rather than in-depth performance."
The 10 songs of the 4th album are meaningful in attempting to combine the 5th scale rhythm of Korean traditional music with Western instruments such as Oh Se-eun's guitar, Son Hae-rae's Lia-con, Park Hoon's bass, Kim Myung-gon's organ, Alto Saxophone, Soo-yeon's drum, and percussion.
Interestingly, Oh Se-eun's world twists into the sound of music at the end of side 2.
In his fourth record, he said that he lacked the ability to express Korean music perfectly with Western instruments. Therefore, he devotes his energy to learning Korean traditional music for seven years, rather than a flimsy album presentation.
In 1983, he wrote and published a textbook on bluegrass guitar, which is essential for playing Blues Rock. Bluegrass is the state law of most Western guitarists such as Eric Clapton, and it is known that Oh Se-eun is unique in Korea.
The 5th song <Namsadang-Seorabal SKJY90008, August 8, 1988> is a definitive version of Oh Se-eun's music. The five scales of Korean traditional music expressed in Western musical instruments are impressive.
"Taesan is high, but under the skies, Moey ..." Oseh's eponymous melodies. Kang, Kang-Sul Rae, combined with Han Young-ae and Lee Bo-im's vocals, is a fantastic fantasy music express itself when Jin Yang Jo, Jung Mori, Jajin Mori, and Whi Mori are freely crossed.
The answer is why enthusiasts have no choice but to enthusiastic about their 5th album. This deep pop song has no origin.
His music must be justly appreciated. Although unpublished, his thirst for music ended up to a certain extent with the completion of the guitar-sanjo record, comparable to Pansori. He abandoned his amp guitar for guitar sanjo and dedicated himself to classical guitar.
He was also part of progrock band Namsadang (1988) and the O Blues band (2012).